원래는 221시간 만에 살아돌아온 매몰 광부과 믹스커피 이야기를 해보려 했어요. 넷플릭스 화제작 <수리남>에서 강인구(하정우 분)는 수리남 군부에 뇌물로 믹스커피를 건네며 “Korean traditional tea”라고 소개를 하죠. ‘믹스커피가 한국 전통차?’라며 의아해하실 수 있지만, 실제로 믹스커피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제품이라고 하더군요.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차로 믹스커피를 꼽은 조사 결과가 있을만큼 외국인들에게 인기있는 차이기도 하고요.
지하 190m 지점에 매몰됐던 광부 2명이 믹스커피를 마시며 221시간을 버틴 끝에 기적적으로 생환한 이야기는 이태원 참사의 절망감에 빠져있는 우리에게 단비 같은 소식이 분명하니, 이번 레터엔 좀 밝은 글을 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믹스커피로 도배된 이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발견한 후, 전 글의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 사고가 난 경북 봉화군 갱도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80년 이상된 노후 갱도인 터라 내부 암석이 자주 부서지고 흙도 수시로 흘러내리는 상황이었다고 해요. 정부는 지난해 12월 사고 우려가 있다며 안전 명령을 내렸지만, 그 이후에도 갱도에선 작업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8월, 광부 2명이 매몰돼 그 중 1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번에 알려진 ‘믹스커피와 기적의 생환’이 있기 전, 이미 그 갱도에선 매몰 사망 사고가 있었던 것이죠.
이상징후가 진즉 있어왔고 실제로 사람이 죽어나가기까지 했지만 그 후로도 광부들은 ‘죽음의 노후 갱도’를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터라 광산업체들은 말그대로 ‘노다지’를 만난 상황입니다. 급등하는 아연 값에 광부들의 안전은 뒤편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갱도에 들어갔던 광부들이 또 다시 매몰되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회사의 대처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엉터리였습니다. 회사는 붕괴사고 발생 직후 자체 구조 작업을 진행하다가 사건 발생 15시간이 돼서야 119 신고를 했습니다. 사건 은폐 의혹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구조 당국이 투입됐지만, 업체가 준 현장 도면이 내부 구조 변경 전인 20여년된 도면이었던 까닭에 제대로 시추를 할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틀 동안 엉뚱한 곳에 구멍을 뚫은 후에야 도면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실측 도면을 이용해 시추 작업을 재개한 지 사흘 만에 광부들이 대피한 곳에 시추기가 닿을 수 있었습니다. 이틀이면 가능했을 작업에 닷새를 허비한 셈이지요.
광부들은 죽음의 갱도에서 사투를 벌였습니다. 체온 유지를 위해 젖은 바닥 위에 나무 판자를 깔았습니다. 천막처럼 비닐을 두르고, 마른 나무를 찾아 모닥불을 피웠죠. 갱도에 갖고 들어간 믹스커피와 암벽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마시며 버틴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고에서 매뉴얼을 지킨 건 광부 뿐입니다. 어긴 건 회사이지요. 광부를 지킨 건 믹스커피입니다. 죽음으로 내몬 건 회사이지요. 희망을 준 건 광부입니다. 절망을 준 건 회사이지요.
아연 값을 생명 값보다 높게 쳐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살(殺)풍경을 우린 언제까지 감내하고 살아야 할까요. 이런 시대에선 ‘믹스커피가 살린 생명’이라는 ‘사실’이 ‘진실’을 가립니다. 우린 사실이 아닌, 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