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하루의 소박한 낙은 저녁 후 먹는 아이스크림입니다. 한달에 꼭 서른 한 가지 맛만 파는 가게의 그 아이스크림 말이지요. 👌👆
엊그제, 이 가게에서 키오스크 주문을 한 뒤 제 아이스크림이 나오길 오매불망하고 있었어요. 때마침, 제 뒤통수를 향해 들려오는 제 주문 번호 소리. 그런데, 그 뒤에 붙은 말 한 마디에 그만 덜컥거리고 말았답니다. "주문번호 OO'님'. 아이스크림 '나오셨습니다.'"
주문번호야 시킨 사람의 호칭 대체재이니 그럴 수 있다 치지만, 하물며 아이스크림에까지 존댓말을 써야 하는 우리나라만의 고약한 풍경에 씁쓸한 웃음이 나왔지요.
그 직원의 잘못된 경어 사용법을 따지려는 게 아닙니다. 경어체 사용법의 옳고그름을 떠나 우리나라의 존댓말/반말 문화에선 차라리 "아이스크림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본인에게 유리한 일이 된다는 것이 훨씬 더 큰 문제라고 전 생각합니다.
높임말을 매순간 정확히 사용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행여 실수로 높여야 할 말을 낮췄다간 그 순간 벼락을 맞겠지요. 심지어 제 여러 알바 경험으로 미뤄 짐작컨대 "아이스크림 나왔습니다"라고 바르게 말해도 혼쭐이 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귀한 손님(이 산 아이스크림)한테 감히 하대 문장을 쓴다고 말이지요. 결국 이꼴저꼴 보기 싫고 더러운 꼴 당하기 싫으면, 경어체의 올바른 사용법 따위 제쳐두고 "아이스크림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그 직원의 입장에선 가장 속편한 일이지요.
이런 고약한 경우 말고 그저 편히 말해도 족할 상황에도 우리의 경어 문화는 사람을 심히 피곤하게 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윗사람에게 "수고하십시오"라는 말을 쓰면 안 됩니다. "과장님, O대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압존법'이라는 것 때문에 틀렸으며, '과장님, O대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라는 게 옳은 표현이나 이 역시 싸가지 없어 보일 수 있으니 '과장님, O대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모 기업 블로그에선 설명을) 합니다.
이 존대하대 문화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현격합니다. 여기에 나이에 따른 서열 정리까지 더해지면 '전세계 최강 존대 문화'가 완성되지요. 나이 많은 어른이 하는 말은 무조건 옳고, 어린 사람이 바른 말을 하면 건방진 게 됩니다. 나이 많은 어른이 나이 어린 사람에게 하는 반말은 친근감의 표시이지만,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어른께 반말을 했다간 칼부림이 벌어지지요.
'Hi'란 말은 평등합니다. 남녀노소, 돈있는자 없는자 모두가 상대방에게 쓸 수 있는 말이니까요. 반면, '안녕'은 불평등합니다. 나이를 더 먹은 사람만, 학교 선배만, 직장 상사만 쓸 수 있으니까요. '안녕'은 권력을 가진 자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즉 우리나라의 말엔 그 자체에 권력이 묻어 있습니다.
말은 의식을 지배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말 자체에 권력이 묻어나 있으니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요. '갑질'이란 말을 번역할 길이 없어 영어로 'Gapjil'이라고 하는 연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